사찰 연혁
- 남북국시대 신라 신덕왕 2년(913년) 승려 대건이 창건했다 추측 - 조선 세종 29년(1447년)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에 의해 전각을 새로 지음 - 순종 원년(1907년) 일본에 대항하던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전소 - 1909년부터 사찰을 단계적으로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사찰 대부분 소실 - 1958년부터 사찰을 복구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용문사 창건 당시 산 이름은 용문산이 아닌 미지산으로 미지는 미르, 즉 용을 뜻한다. 사찰명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 남북국시대 신라 신덕왕 2년(913년) 승려 대건이 창건했다 추측 - 조선 세종 29년(1447년)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에 의해 전각을 새로 지음 - 순종 원년(1907년) 일본에 대항하던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전소 - 1909년부터 사찰을 단계적으로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사찰 대부분 소실 - 1958년부터 사찰을 복구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세자였던 마의태자는 국력의 열세로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하자 이를 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이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태자는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떠나기로 했다. 금강산으로 가던 중 양평 용문사에 들려 통일 신라의 신세를 한탄하며 은행나무를 심었고 태자는 금강산에서 은둔하며 풀과 나무뿌리로 연명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