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 승려 자장이 창건
- 이후 사찰은 화재로 소실
- 승려 의상이 사찰을 다시 세우고 '선정사'로 변경
- 조선 인조 22년(1644년) 화재로 또 다시 소실
- 2년 후 선정사에서 약 4km 떨어진 자리에 사찰을 세우고 '신흥사(神興寺)'로 사찰명을 변경
- 한국전쟁 당시 신흥사 보제루에 보관중이던 경판을 가져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땔감으로 사용했으며 당시 이 부대 소속이던 리영희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소각을 막음(남은 경판은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 1995년 신흥사(神興寺)에서 신흥사(新興寺)로 사찰명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음
관련 설화
아득히 먼 옛날 금강산 1만 2천봉 중 최고가 되겠다며 울산에서 길을 나선 바위는 금강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설악산에 눌러앉았다.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 울산에 부임한 원님은 울산바위 이야기를 듣고 신흥사 주지에게 '울산 출신 바위를 설악산에 놓아두었으니 세금을 내시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근심에 쌓인 주지 앞으로 한 동자승이 나타나 자신이 해결하겠다 말했다.
며칠 뒤 나타난 원님에게 동자승이 '우리도 저 바위를 울산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곡식을 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고 원님은 바위를 가져갈 테니 3일 안에 바위를 새끼로 묶어달라고 말했다. 동자승은 승려들에게 해초를 꼬아 바위에 두른 후 불을 붙이면 불에 탄 해초의 재 때문에 줄로 묶은 것처럼 보일 것이라도 했다. 승려들은 바로 실행에 옮겼고 3일 뒤, 원님은 울산바위의 모습을 보고 신통한 도사가 있다고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
이후 사람들은 지역을 속(묶을)초(풀)로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