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854년 승려 염거가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 - 병자호란으로 사찰 소실 후 터만 남음 - 1790년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의 능를 이장하고 터만 남은 갈양사를 용주사로 변경하고 사찰을 재건 - 한국전쟁으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 소실 - 1988년 호성전을 복원하였으나 2020년 화재로 전소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 사찰이라는 의미
- 854년 승려 염거가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 - 병자호란으로 사찰 소실 후 터만 남음 - 1790년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의 능를 이장하고 터만 남은 갈양사를 용주사로 변경하고 사찰을 재건 - 한국전쟁으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 소실 - 1988년 호성전을 복원하였으나 2020년 화재로 전소
조선 22대 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승려 보경을 찾아 아버지의 원혼을 달랠 방법을 물었다. 보경은 부모의 10대 은혜에 관한 불경인 '부모은중경'을 설하며 경기도 화성이 좋은 땅이니 그곳으로 아버지를 이장하고 주변에 사찰을 세워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것을 제안했다. 정조는 아버지를 지금의 융릉으로 이장한 후 사찰을 세울 장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주변에 병자호란으로 폐사된 '갈양사' 터를 찾았으며 그곳에 사찰을 다시 세우라 명했다. 사찰 완공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정조는 사찰에서 잠을 청했는데 꿈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서 깬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마침내 한을 풀고 하늘로 승천한 것이라 생각해서 사찰 이름을 용주사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