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승려 무학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 -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사찰을 확장하고 왕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지정 -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사찰은 소실되어 폐사 - 1957년 승려 도공이 황폐해진 사찰을 복구하고 전각을 보수 - 1996년 목정굴을 복원하고 전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금선(金僊)은 부처를 지칭, 즉 부처의 사찰을 의미(사찰 설화와 관련)
-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승려 무학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 -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사찰을 확장하고 왕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지정 -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사찰은 소실되어 폐사 - 1957년 승려 도공이 황폐해진 사찰을 복구하고 전각을 보수 - 1996년 목정굴을 복원하고 전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조선 정조 시절, 암행어사 박문수는 한 사찰에서 젋은 스님들이 수행에 힘쓰기보단 장기를 두는 등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정조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이후 전국의 승려들은 한지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성곽 쌓는 일에 동원되는 등 노비 아닌 노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구 파계사 수행하던 승려 용파는 불교 탄압을 알리기 위해 임금을 알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승려 신분으로는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용파는 도력으로 한강에서 청룡과 황룡이 엉키어 올라가는 모습을 연출하여 이목을 끈 후에야 정조를 알현할 수 있었다. 용파는 눈물 어린 호소로 불교의 탄압을 받도 있는 상황을 알리자 정조의 마음이 움직였고 정조는 승려들의 형편을 헤아려줄 테니 자신의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정조를 알현한 용파는 금선사 목정굴에서 수행하던 승려 농산과 함께 300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어느 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말했다. “소승은 농산이라 하며 금선사에서 수행 중입니다. 소승이 마마의 몸속에 들어가 나라의 대를 잇겠습니다.”라는 태몽을 꾸고 순조를 출산했다. 출산 소식을 듣고 정조는 금선사로 사람을 보냈으나 목정굴에서 수행하던 농산은 막 열반에 들었다. 정조는 용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금선사를 크게 확장하였다. 금선사는 지금도 해마다 음력 6월 18일, 순조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