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일제강점기 별장으로 쓰였던 '청암장'을 궁중 기생 출신 김영한이 매입 - 매입 후 한식집 운영 - 군사정권 시절 기생이 있는 술집, 요정으로 업종 및 상호를 '대원각'으로 변경 - 1997년 당시 시가 약 1천원대의 대원각을 순천 송광사에 시주 - 시주자 김영한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이름을 딴 '길상사' 창건
길하고 상서로운 사찰
- 일제강점기 별장으로 쓰였던 '청암장'을 궁중 기생 출신 김영한이 매입 - 매입 후 한식집 운영 - 군사정권 시절 기생이 있는 술집, 요정으로 업종 및 상호를 '대원각'으로 변경 - 1997년 당시 시가 약 1천원대의 대원각을 순천 송광사에 시주 - 시주자 김영한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이름을 딴 '길상사' 창건
한때 읽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평안도 사투리를 자주 시에 사용했던 시인 백석(본명 백기연, 1912 ~ 1996)은 일본에서 유학 후 함흥고보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석은 조선 궁중 기생이었던 김영한을 만나 한눈에 반해 "당신이 내 부인이니 앞으로 평생 함께 지냅시다"라고 말을 건냈다고 하며 김영한이 읽고 있던 이백이 쓴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보고 '자야'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백석과 자야는 동거를 시작해 2년여의 시간을 보냈으나 백석 아버지의 반대로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백석은 북으로 떠나 평생 다시 보지 못하는 운명을 겪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자야는 억척스레 돈을 모아 큰 부자가 된다. 그녀의 말년에 대원각을 시주하는데 한평생 모은 돈이 아깝지 않냐는 질문에 "1000억원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며 평생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