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고려시대 승려 탄문이 삼각산에 세운 보덕암을 조선 중종 17년(1522년) 승려 신월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고 사찰명을 '화계사'로 변경 -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후 오랜시간 방치된 사찰을 흥선대원군의 불사로 보수 - 1912년 관음전과 시왕전을 시작으로 전각을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꽃(華)과 시냇물(溪)이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사찰이라는 의미
- 고려시대 승려 탄문이 삼각산에 세운 보덕암을 조선 중종 17년(1522년) 승려 신월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고 사찰명을 '화계사'로 변경 -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후 오랜시간 방치된 사찰을 흥선대원군의 불사로 보수 - 1912년 관음전과 시왕전을 시작으로 전각을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흥선군에 봉해졌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 제대로 힘을 펴지 못하는 허울뿐인 왕족인 이하응은 어느 여름 날 화계사를 찾게 되었다. 도착할 즈음 갈증이 몹시 심했는데 사찰 앞에서 동자승이 꿀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기이하게 여긴 이하응은 그 연유를 물었고, 동자승은 화계사 주지인 승려 만인이 귀한 손님이 오신다며 미리 마중나가 손님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말했다. 이하응은 호기심이 생겨 곧바로 만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고 마음이 맞는다는 것을 느껴 만인에게 심금을 터놓게 되었다. 즉 안동 김씨의 세도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다. 만인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충청도 덕산 가야산의 가야사 금탑자리가 왕의 기운이니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그리로 이장하면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후 이하응은 가야산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고 탑을 허문 뒤 형제들을 설득하여 가야사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고 시간이 지나 이하응은 아들을 얻었다. 이 아들은 훗날 조선의 왕, 고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