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승려 의상이 '옥천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 - 조선 태조 7년(1398년)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추억하여 사찰 증축을 명하고 천축사라는 사액(寺額)을 내림 - 성종 5년(1474년)부터 1959년까지 몇 차례 사찰을 보수하고 전각을 새로 지음 - 1964년 면벽수도를 위한 무문관 신축
고려 때 인도 승려 지공이 이곳의 경관이 부처가 법화경을 설법한 천축(인도)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한 데서 유래
-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승려 의상이 '옥천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 - 조선 태조 7년(1398년)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추억하여 사찰 증축을 명하고 천축사라는 사액(寺額)을 내림 - 성종 5년(1474년)부터 1959년까지 몇 차례 사찰을 보수하고 전각을 새로 지음 - 1964년 면벽수도를 위한 무문관 신축
밥이 드나드는 구멍 외엔 사방이 꽉 막힌 방인 ‘무문관’은 수행자가 깨달음을 위해 자신을 가두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고 면벽수행을 하는, 스스로 들어간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무문관은 석가모니가 6년 동안 설산에서 수행 한 것을 모티브로 만든 곳으로 이곳에서 수행한 승려 중 6년의 기한을 제대로 채운 승려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이 중 한 명인 승려 제선(법명 :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온 사람)은 무문관 수행의 창시자이다. 제선은 원래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며 고향 제주도로 돌아와 결혼 후 아들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금강산으로 가서 생을 마감하려고 ‘死’ 9장, ‘生’ 1장을 써 제비뽑기로 ‘生’을 뽑아 마음을 고쳐먹고 출가해 승려가 되기로 했다. 제선은 무문관에서 6년 수행을 마치자 홀연히 부산에서 여수행 배에 오른 것을 끝으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