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광종 20년(969년) 승려 탄문이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
- 조선 예종 원년(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에 의해 사찰을 확장하고 예종이 '봉선사'로 이름 변경
-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사찰 대부분 소실
- 조선 인조 15년(1637년) 사찰 보수 및 재건
- 조선 정조 14년(1790년) 왕실의 안녕과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고 승려의 분위기를 감시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아, '규정소' 지정
-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찰 대부분 소실
- 1959년 사찰을 보수 및 재건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관련 설화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 7대 왕 세조는 풍수에 능하였다. 세조는 사후 자신이 묻힐 지역을 찾아다니다 우연히 아버지를 묻고 있는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세조는 지금 아버지의 묘는 풍수가 좋지 않아 지척에 좋은 땅이 있으니 그쪽으로 아버지의 묘를 옮기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상주는 어느 노인이 이곳에 아버지를 모시라고 말했으며 너무 가난하여 지금은 그곳으로 이장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사정을 듣고 가족에게 이장할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을 하사한 후 노인을 수소문해 만나게 되었다.
세조는 노인에게 왜 흉한 땅에 묏자리를 쓰라고 했는지 물었고 노인은 그 가족들이 너무 가난해 살림을 지속할 수 없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땅을 알려준 것이라도 대답했다. 이를 듣고 감탄한 세조는 노인이 왜 이리 궁색하게 생활하고 있는지 물었다. 노인은 왕이 찾아올 땅이라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다며 큰 절을 올렸다.
세조는 노인을 바라보며 자신은 지금 사후 묻힐 땅을 찾고 있는 중이라며 노인에게 자신이 묻힐 땅을 찾아달라 부탁했으니 지금의 광릉이다. 봉선사는 세조 사후 세조와 왕비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