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15년(756년) 승려 수태가 창건 -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고종 때 엄상궁의 시주로 전각을 새로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 - 1957년 비구니 스님 도명이 전각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중국 당나라 시절 대중을 교화하면서 살아있는 부처로 불렸던 승려 승가를 기리는 사찰
-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15년(756년) 승려 수태가 창건 -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고종 때 엄상궁의 시주로 전각을 새로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 - 1957년 비구니 스님 도명이 전각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부모님을 여의고 갈 곳이 없어 승가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던 김점례는 이곳의 승려들을 보며 성인이 되는 스무살에 비구니가 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기 며칠 전 서울에 사는 귀부인이 7대독자인 아들의 신부감을 찾기 위해 승가사를 방문했다. 법당에서 기도를 드린 후 문 밖에서 점례와 마주친 귀부인은 자기 가문을 이을 며느리로 낙점하고 주지스님을 설득하였다. 처음에는 혼례를 거절하던 주지스님은 귀부인의 지속적인 부탁으로 결국 점례의 혼인을 승락하였다. 다시 속세로 내려온 점례는 두 번의 결혼을 실패한 귀부인의 남편과 결혼했으며 자상하지 않은 남편이지만 남편과 시부모를 섬기며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태기를 느낀 점례는 병원을 방문하여 검사받던 중 임신과 함께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는 점례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고 시부모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시부모는 점례보다는 손주가 더 필요하다며 이 사실을 점례에게 알리지 않았고 이후 점례는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는 사실도 모른 채 아들을 출산하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점례는 승가사 뒤 양지바른 곳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시어머니는 유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땅에 대충 묻었다. 세월이 흘러 점례의 아들과 며느리가 결혼승락 차 인사를 드리러 아버지에게 방문했을 때 며느리를 처음 본 아버지는 며느리를 점례로 착각해 발작을 일으켰다. 때마침 그 집을 방문한 승가사 주지스님이 이 사실을 알게되고 불단을 차린 후 '점례야,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원한 속에 죽게 된다'라고 하자 남편의 발작이 멈추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