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인 엄씨의 지시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고려 후기에 사찰이 존재했다는 자료가 최근 발견 - 한국전쟁으로 사찰은 소실되고 석상들은 노상에 방치 - 이후 신도들의 시주로 미륵보전을 지어 석상들을 안치하고 관음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염원하는 사찰'라는 의미
-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인 엄씨의 지시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고려 후기에 사찰이 존재했다는 자료가 최근 발견 - 한국전쟁으로 사찰은 소실되고 석상들은 노상에 방치 - 이후 신도들의 시주로 미륵보전을 지어 석상들을 안치하고 관음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대한제국 광무 5년(1901년) 어느 날 후궁 엄비는 낮잠을 자던 중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은 일곱 색깔의 무지개를 일곱 미륵이 타고 집으로 들어와 ‘우리는 청주의 한 늪에 있는데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찰을 짓고 구해 달라’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꿈을 허투로 생각치 않고 청주 군수 이희복을 불러 꿈 내용을 설명하며 무심천에서 석불을 찾아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희복 역시 자신도 3일 전 같은 꿈을 꾸었다며 놀라워했다. 청주로 돌아가 꿈에서 알려준 장소를 찾아가보니 땅 속에 묻혀있던 7구의 불상을 찾았다. 그후 불상들을 안치하고 사찰을 세우기 위해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불상들을 발견한 장소로 이주하고 용화사로 이름을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