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사(金水寺)

    정유재란 이후 일본과 협상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이곳을 방문한 승려 사명당이 물맛과 경치에 감탄, '감로금정수(甘露金井水)'라 부른 것에서 유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843
    초량역 3번 출구 앞 52번 버스 -> 금수사 하차
    이바구길 탐방 / 초량1491(우유카페) / 이바구캠프(게스트하우스)
    템플스테이 미운영
    없음
    불가

    사찰 연혁

    - 승려 사명당을 수행하던 한 제자가 이곳에 ‘금수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 - 하지만 창건 이후의 자료는 전해지지 않음 - 1910년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의 승려 동호가 이곳의 옛 사적을 추모하여 전각을 새로 짓고 금수정사(金水精舍)라는 이름으로 변경 - 1961년 대광명전을 짓고 이후 몇 차례 전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관련 설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은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피난민들의 처절한 삶을 보며 당시 금수사 지주 승려 법홍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오갈 곳 없는 피난민들에게 사찰 앞 마당에서 쉴 수 있게 하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금수사에 도움을 호소하는 피난민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에 주변 땅 1000평을 매입해 모두 피난민들의 생활공간으로 제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으로 피난 온 초대 부통령 이시형은 금수사로 찾아와 국난극복의 염원을 담아 윤봉길, 안창호, 안중근 등 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셔 달라 간청했다. 이에 금수사는 민족대표 33인의 위패를 모시고 이들을 위한 추모법회를 열었으며 이후 순국선열 추모법회는 금수사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