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백제 성왕 22년(544년)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가 '오산사'라는 이라는 이름으로 창건 - 하지만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음 - 조선 인조 8년(1630) 전각을 다시 지었으나 작은 암자로 명맥을 겨우 이음 - 1990년대 절벽에 약사전을 짓고 2000년대 초 산길을 새로 뚫어 사성암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음
네 명의 고승(원효, 의상, 도선, 진각)이 각자 암자를 짓고 수도했던 장소라는 의미
- 백제 성왕 22년(544년)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가 '오산사'라는 이라는 이름으로 창건 - 하지만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음 - 조선 인조 8년(1630) 전각을 다시 지었으나 작은 암자로 명맥을 겨우 이음 - 1990년대 절벽에 약사전을 짓고 2000년대 초 산길을 새로 뚫어 사성암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음
사성암이 있는 죽연마을에는 섬진강 물길로 물건을 하동으로 운반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공 가족이 살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어느 날, 사공은 뗏목에 벌목한 나무를 싣고 하동으로 떠났다. 시간이 지나 여느 때처럼 돌아올 기간이 지났음에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오산암 뜀바위에서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도했다.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부인은 기도 중 발을 헛딛는 바람에 신발 한 짝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에 불길함을 느낀 아내는 초조한 나날을 보내다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남편은 아무 문제없이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갈 기간보다 늦게 뗏목을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집으로 가고 있었다. 배에서 노를 젓던 중 물 위에 떠있는 신발을 발견하고 건져올리니 다름아닌 아내의 신발인 것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노를 저어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신발 한 짝과 이미 시신뿐이었다. 이에 사공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아내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