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신라 진덕여왕 시기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관련 자료는 전해지지 않음 - 고려 초 승려 진관(津寬)은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를 지어 홀로 수행 - 고려 왕족이고 태조의 피를 직계로 이은 아이였던 왕순은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의 눈에는 가시와 같았다. 왜냐하면 목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면 왕위는 왕족인 왕순에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 - 이에 천추태후는 왕순을 신혈사 승려로 보내버렸다. -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신혈사 승려 진관이 위험을 무릅쓰고 왕순을 지켜 마침내 고려 8대 왕으로 즉위 - 이후 신혈사는 진관사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진관사는 고려 왕조 내내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음 - 조선 태조는 연등회의 하나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정치적인 격변기에 생성된 불교의례인 수륙재를 처음 개최('진관사 수륙재'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 - 세조 9년(1463년) 화재로 사찰이 소실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보수 및 전각을 새로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독성전, 나한전, 칠성각을 제외한 나머지는 소실 - 1964년 비구니 승려 최진관이 사찰을 남아있는 전각을 보수하고 전각을 새로 지어 비구니 사원으로 변경 *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