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남북국시대 신라 애장왕 5년(804년) 승려 심지가 창건 - 하지만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자료는 전해지지 않음 - 임진왜란 때 사찰이 전소 - 선조 38년(1605년) 전각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숙종 때 대대적으로 사찰을 확장 - 1979년 관음보살상의 금을 덮어 씌우는 작업을 하던 중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도포와 발원문이 발견
파계는 "물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로 사찰 주위에 흐르는 기운이 사찰 밖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홉개의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은 것에서 유래
- 남북국시대 신라 애장왕 5년(804년) 승려 심지가 창건 - 하지만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자료는 전해지지 않음 - 임진왜란 때 사찰이 전소 - 선조 38년(1605년) 전각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숙종 때 대대적으로 사찰을 확장 - 1979년 관음보살상의 금을 덮어 씌우는 작업을 하던 중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도포와 발원문이 발견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은 노역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수행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파계사 지주 현응은 조선 20대 왕 숙종을 알현하고자 한양으로 올라갔다. 숭례문 근처에서 잡역을 하며 임금을 알현할 기회를 기다리며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응은 파계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관이 한양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던 현응을 찾아와 임금이 현응을 만나려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 이유는 숙종이 숭례문, 현응이 묵은 숙소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임금을 알현하게 된 현응은 억불정책을 지속하면 나라에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 간언했고 숙종은 현응의 부탁을 들어주며 세자를 얻기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파계사로 돌아간 현응은 친분이 두터웠던 승려 농산에게 조선의 승려들을 위해 숙종의 아들로 환생할 것을 권했으며 농산은 백일 기도 후 입적하여 숙종의 아들로 환생했다. 이후 파계사는 조선 선왕들의 명복을 기리며 위패를 봉안하는 원당을 설립하고 왕실 원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