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조선 중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관련 자료는 전해지지 않음 - 1987년 사찰을 보수하고 전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이곳을 한 번이라도 방문했거나 사찰 이름을 생각만 해도 최고의 행복을 얻으라는 의미
- 조선 중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관련 자료는 전해지지 않음 - 1987년 사찰을 보수하고 전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낙화(落火)는 오랜 옛날부터 사찰에서 부정한 기운을 제거하고 안전을 기원하며, 숙세(宿世)의 악업(惡業)을 정화하던 소재구복 (消災求福) 의식이었다. 이런 낙화는 민간으로 흘러 나가 정월 대보름 액막이 의례로 바뀌게 된다. 민간으로 유입되어 액막이 의례가 되었던 낙화는 조선 후기에 다시 한 번 성격이 바뀌어 불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즐기는 유희적 성격의 낙화놀이로 정착된다. 조선 후기까지 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의 대표적 민속놀이로 전래되어 오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단절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영평사 환성스님에 의해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화법은 다음과 같은 변화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먼저 연등(燃燈)과 낙화(洛火)를 동일한 범주에서 다루지 않고, 등(燈)과 화(火)를 분리하여 기원과 개념을 밝혔다. 등은 수행처를 밝혀 수행을 돕는 상징이며, 화는 대신변일(大神變日, 정월 15일)의 소재도량이다. 등(燈)과 화(火)는 중국에서 고대 세시풍습인 폭죽·상원일·납제일 등과 결합하여 연등회를 탄생시킨다. 국가나 왕실이 주관하는 상원연등회는 크게 연등과 불꽃놀이(화약사용)로 구성한다. 이 행사는 신라로 유입되고,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무신기를 지나며, 상원연등회에서 연등과 불꽃놀이의 주체는 왕실에서 사찰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조선왕실의 불꽃놀이에 대한 인식은 재난·재해의 퇴치와 치병이며 왕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것으로 소재도량의 설행을 의미했다. 화약 재료인 염초(焰硝, 질산칼륨)와 황의 수급문제가 발생하자, 화약 재료 중에 남아있는 숯 만을 사용한 낙화법을 고안하게 된다. 종이와 숯의 수급이 용이했던 사찰에서는 숯을 이용한 불꽃놀이에 불교의궤를 접합한 불교의례로 발전시킨다. 이 낙화법은 불교에서 화(火)의 개념에 담겨있던 재난을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는 의미를 담아냄은 물론 밀교의 삼밀(三密)수행을 잘 담아내고 있다. 때문에 낙화법은 놀이가 아닌 불교 수행법으로 의의가 있고, 매년 10월 영평사에서 낙화 전통문화축제가 열린다. * 출처 : 낙화 전통문화축제 사무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