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연혁
- 고려 태조 8년(926년) 태조 왕건의 명으로 승려 영조가 창건 -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찰 전소 후 폐사 - 조선 인조 22년(1644년) 승려 취감이 사찰 복구 및 전각을 다시 지음 - 점차 사세가 기울어 명맥만 유지 - 1947년 승려 해응이 사찰을 보수 - 1978년 승려 종원이 대웅전을 새로 짓기 시작, 몇 차례 전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대패한 고려 태조 왕건이 굴에 피신해 화를 면했던 장소에서 유래
- 고려 태조 8년(926년) 태조 왕건의 명으로 승려 영조가 창건 -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찰 전소 후 폐사 - 조선 인조 22년(1644년) 승려 취감이 사찰 복구 및 전각을 다시 지음 - 점차 사세가 기울어 명맥만 유지 - 1947년 승려 해응이 사찰을 보수 - 1978년 승려 종원이 대웅전을 새로 짓기 시작, 몇 차례 전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후삼국시대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 경애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팔공산에서 싸웠으나 대패했고 왕건은 자신의 부하인 신숭겸과 김락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앞산으로 도망친 왕건은 추격병들을 따돌리기 위해 산 속 굴에 숨었다. 왕건이 굴에 숨자 갑자기 왕거미가 나타나 굴 입구에 거미줄을 촘촘히 쳐서 입구를 막아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건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굴에서 사흘간 머문 후 고려로 무사히 돌아갔다. 고려로 무사히 돌아간 왕건은 자신이 사흘간 은신했던 굴이 있는 곳에 사찰 창건을 지시하고 '은(숨을 은)적(자취 적)사’라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