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雲門寺)

    후삼국의 통일을 도운 승려 보양에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직접 지은 이름 ‘운문선사’에서 유래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운문사
    청도역 3-10,번 3-11번 버스 -> 운문사정류장 하차 -> 도보 20분(소나무 숲 길)
    신화랑풍류마을 / 자수정동굴나라 / 간월산온천&텔(온천인증)
    템플스테이 운영
    무료

    사찰 연혁

    -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대작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으나 창건자는 전해지지 않음 - 당시 운문사 주지였던 일연이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 집필 -
임진왜란으로 사찰 일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대부분의 전각이 큰 피해를 받지 않음 - 1958년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르고 있음

    관련 설화

    승려 보양이 당나라에서 유학 후 신라로 귀국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 배가 난파되어 바다에 빠졌다. 바다에 빠진 보양은 용왕을 만나게 되고 용왕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후 용왕은 불법에 감탄하여 보양을 다시 돌려보냈으며 용왕의 아들 이목을 함께 동행해 불법을 배우게 했다. 보양은 무사히 신라로 귀국하여 사찰을 창건하게 되었다. 창건 후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보양은 용왕의 아들인 이목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라 부탁하였고 이목은 그 부탁을 받아들여 비를 내리게 했다. 하지만 옥황상제는 자신의 허락없이 비를 내렸다며 옥황상제의 사신를 보내 이목을 잡아오라 지시했다. 사찰에 도착한 사신은 보양에게 이목이 어딨나고 다그쳤다. 그러자 보양은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은 저기에 있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벼락이 배나무 아래로 떨어져 큰 웅덩이가 생겼으니 이후 사람들은 그 웅덩이를 '이목소(梨木沼 )'라 불렀다.